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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dCourt

3000원만 내기 미안한 손수제비

by 대청호블루스 2009. 9. 25.

중학교때 돌아가신 할머니는 음식을 참 잘 만드셨습니다.
양반집 대대로 내려오는 고급 음식은 물론이고 막먹는 간식조차 할머니의 뭉툭한 손을 거치면 신기하게도 맛깔스럽게 변신했습니다.

우리동네에선 내노라하는 요리명인인 할머니때문에 며느리인 엄마는 참 힘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솜씨를 따라잡기 어려웠던 것인지 아니면, 엄마는 할머니처럼 손끝이 야물지 못해서였는지 늘 시어머니의 성에 차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사나흘 앓곤 돌아가시자 서서히 우리집 음식의 맛과 깊이가 달라졌습니다. 비슷하긴 하지만 늘 2% 부족함이 느껴지는...(그래도 배고프던 시절이라 없어서 못먹던 시절이지만요^^)

무엇보다 가장 아쉬운 것은 장맛이었습니다. 된장과 고추장, 간장의 맛이 전과 달랐고 이것은 모든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테니 할머니의 비법을 전수받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 아쉬움을 일깨운 음식을 만났습니다.


어느날 회사근처 분식점에서 수제비를 먹다 발견했는데요... 그다지 민감한 혀를 갖진 못했지만 웬지 국물에서 잘 익은 '할머니표' 조선간장의 감칠맛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뭐 비슷한 맛일꺼야 생각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어느날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이거 집간장으로 간한거예요?"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머니 말씀하시더군요.

"집간장으로 하는 것은 맞는데 조미료도 조금 넣어요"

다시마와 야채등을 삶아서 만든 육수에 수제비를 끓이는데 국간장만으로 간을 맞추니 검어지는 문제도 있고 화학 조미료맛에 익숙해진 손님들이 자꾸 뭐라해서 조미료도 아주 조금 넣는다고 솔직히 얘기하십니다.

특히 여든의 시어머님이 직접 담궈주시는 간장은 3년묵은 것으로 좀 검은 편이지만 맛이 너무 좋다고 자랑하십니다. 정말 맛이 참 좋습니다.  직접 담근 장도 장이지만 직접기른 호박이며 장에서 사다가 말려서 빻은 고추가루 하며 집에서 먹는것처럼 좋은 재료를 만들어서 보내주시는 분식집 시어머님의 정성 덕분에 제 입이 호강을 하고 있는거지요.


잘 준비해둔 육수에 숙성된 밀가루 반죽을 뚝뚝 떠넣고 시어머님이 농사지어 보냈다는 호박도 넣고 집간장으로 간을 한 수제비. 동네분식점에서 발견한 혼자만 알고 싶은 맛이라고 할까요? 어릴적 할머니의 정성을 생각하면 3000원을 내고 나오기가 미안해지는거 있죠. 실제가격이 미안하게 착하기도 하구요. 여든의 할머니와 그 며느리의 정성과 맛을 혼자만 누리기 미안해 공개합니다.  갈마2동사무소 뒷골목에 있는 해맑은 김밥집에 가시면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어머님도 이제 힘이든다고 하신답니다. 하긴 여든이 넘으셨다니 빨리 비법 전수를 받으셔야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