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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_is....

20년 업무을 접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친구에게

by 대청호블루스 2010. 4. 29.

"오늘 편집기자 20년의 마우스를 놓았습니다"

한밤 걸려온 Y의 전화는 감기약때문에 몽롱한 상태로 비몽사몽이었던 나의 모든 감각을 깨웠습니다. '마지막 보고'까지 너무나 정확하게 '마우스를 놓는다'는 표현을 쓴 Y는 20년동안 기자조판을 한 우리나라 기자조판 1세대  편집자입니다. 그러니 '펜을 놓는다' '펜을 꺾는다'가 아닌 '마우스를 놓는다'는 말이 정확한 셈인거죠.

Y는 20년 편집기자 생활을 그 누구보다 정열을 바쳐 최선을 다했습니다. 척박한 신문환경속에서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누구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은근과 끈기로 실력을 발휘한 존경할만한 편집자였습니다.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인사발령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Y의 목소리는 오랜 연인과 사랑앓이를 끝낸사람처럼 담담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술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Y와 통화를 하는 동안 그가 좋아했던 오규원시인을 떠올렸습니다.  초년병 시절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란 시집을 읽으며 묘하게도 편집기자의 세계가 오규원이 그리는 시인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時에는 아무것도 없다. 時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
오규원시인의 용산에서 중 일부>

거대한 신문위기속에 편집기자는 '믿고 싶지 않지만/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시인처럼 그런 세월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우중충할수록 핵심을 찌른 기사 선택과 무릎을 치게하는 제목, 멋진 레이아웃을 토해내려 애썼던 Y같은 친구들의 궤적이야말로 잿빛 패배의식속에서 더 빛나던 보석이었습니다.

"회사의 뉴미디어 전략일을 하게 됐습니다"

20년 걸었던 터널을 빠져나온 Y가 만날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광장입니다. 뉴미디어 전략을 짜게 된다니, 이정표조차 없어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잡는것이 가장 큰 과제겠지요. 서성이는 날들이 많아질 수도 있을겁니다. 다행히 개척자처럼 새로운 길을 만들고 이정표를 세울수도 있을겁니다.

업무시작과 함께 몇가지 검토하는 일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안한 일이지만 갑자기 반가워졌습니다. 같이 고민할 친구가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요?  학구적인데다 실천력도 강한 Y라면 어떤 그림이라도 그릴것이 명약관화. 머잖아 바로 밑천을 드러난다해도 제가 아는 이야기들을 기꺼이 꺼내놓을 겁니다. 바닥을 드러내지 않기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가 될테니 제게도 아주 멋진 자극입니다.

Y의 교과서 같았던 20년, 최선을 다했으니 고생했단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서도 잘될거라고 응원해주고 싶습니다.

"가는 20년, 오는 20년을 얘기하며
초년병시절 그랬던것 처럼 환하게 웃어볼까요?
대전에
한번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