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Life_is....

시아버님 1주기였습니다

by 대청호블루스 2008. 11. 19.

89년말 어느날, 결혼 허락을 받기위해 시댁에 인사를 갔습니다. 
어찌나 떨리고 긴장했던지 겨울이었는데도 손바닥에 땀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니 맨먼저 교회에 다닐지를 물으셨습니다.
당신께서 한 교회의 장로이시기도 했고 장로라는 직분이 아니더라도 정말 독실한 신자이셨기때문에 며느리감으로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게 단 하나의 조건이라는 얘긴 남편에게 이미 들었던 터였지요.

그러겠다고 답변을 하니 직장 문제를 물으셨습니다.

당시 충대병원 간호사였던 나는 3교대의 시차 부적응과 말기암 환자에 대한 감정이입때문에 무척 힘들어 했었습니다. 당연히 결혼과 함께 전직이나 퇴사를 고민중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을 아마도 얘기했던것 같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래도 가능한 직장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해주신 말씀은 여자에게 직장의 중요성. 특히 한국에서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자연인 아무개로 살아가기 위해선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직장이 아니면 사회봉사를 하면서라도 이름을 갖고 살라"고.

78세의 노인이 하시는 말씀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여성관을 들으며 내심 참 놀랐습니다. 여성관 뿐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학교를 다니신분도 아닌데 정치며 경제며 해박하신 지식과 젊은사람과의 대화에서도 고루함이 느껴지지 않는 반듯한 가치관. 강직함. 50년이 넘는 나이차이에도 '말이 통하는' 분이셨습니다. 가끔씩(자주 가지 못했던게 가슴아픕니다) 시댁에 갔을때 아버님과 대화를 나누는게 또 아버님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이야기를 듣는게 크나큰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초대 읍의원을 지내셨던 아버님과 관련된 인터뷰 기사 입니다. 아버님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존경했던 그분이 아흔여섯의 생을 마감하고 천국에 가신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라 오랜만에 형제자매가 모였습니다. 자식은 7남매를 두셨는데 미국에 형제 둘, 일본에 자매가 나가 있다보니 좀처럼 다 모일 일이 없습니다. 오늘도 바쁜 사람은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짐작컨데 아버님 서운해 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돌아가시면서도 멀리있는 자식들 오지 않게 연락하지 말라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유언하시기를 화장해서 수목장으로 해달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대전지역에 마땅히 수목장할 곳을 찾지 못해 아버님 뜻을 어기고 묘소를 만들었습니다. 아버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런 날 찾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살아남은 자손들에게는 위안처가 되기도 한다는걸 오늘 알았습니다.


추모예배후 들른 묘소사진입니다. 쌀쌀해진 날씨때문에 서둘러 일부는 차에 탔고 몇분이 주변 경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평소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셨던 아버님을 닮았는지 자식들의 옷차림도 울긋불긋합니다.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버님이 수첩중에 써 있던 메모를 찍어둔 사진입니다. 당신부터 어머님 자식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이름과 생일과 주민번호가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외국에 나가있는 자식과 한번도 본적없는 증손자까지 꼼꼼하게 적어두신 이메모를  보고 또 얼마나 뭉클하던지.   


아버님을 기리며 목사님으로 계신 큰 아주버님이 추모예배에서 인용하신 성경 말씀을 붙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