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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_is....

할머니가 무슨 예쁜 지갑이 필요하냐구요?

by 대청호블루스 2009. 8. 30.

지난 6월 미국에 계시는 시아주버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시아주버님은 한국을 방문하면서 가족별로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오셨는데 저를 비롯한 일가친척 성인 여성에게는 사진속의 코치파우치를 주셨습니다. 어머님께는 비타민, 글로코사민같은 건강보조제를, 남편에게는 비타민을, 딸에게는 고급초콜릿을 그리고 제겐 파우치.

각자 받은 선물을 풀어보았는데 어머님이 이 파우치를 마음에 들어 하시더군요.

아주버님이 놀라시는 표정으로 "엄마도 이런 손지갑이 필요해?" 라고 말하셨는데 살짝 서운해하시는 표정이 지나가더군요.

제게는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손목에 거는 줄도 있고 해서 어머님이 집앞 슈퍼에 갈때 아주 요긴하게 쓰실 수 있을 것 같아 아주버님 모르게 살짝 드렸습니다. 어머님이 쓰시던 손지갑이 좀 오래돼서 바꿔드리고 싶기도 했었거든요. 그리고 그 파우치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이 파우치를 쓰시는걸 보고 시누이가  한 소리 하셨나 봅니다.

"엄마는 왜 며느리 물건을 뺐었냐"는 거지요. "내년이면 아흔 노인네가 무슨 예쁜 지갑이 필요하냐"며 당장 며느리한테 돌려주라고 덧붙였다나봐요.

파우치를 도로 제게 내놓으시면서 어머님은 "노인네는 예쁜 지갑을 들으면 안되는 법이 있냐"고 제게 따지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딸에게는 하시지 못했던 말씀을 한참 시더군요. 빼앗은 것도 아니고 제가 드린걸 받아 쓴 어머님으로선 매우 억울하셨을 겁니다.

"어차피 제게는 쓸모없는 물건"이라며 어머님을 설득하고 서운함을 풀어드려야 했습니다. 시아주버님이나 시누이도 생각없이 한 말이겠지만 어머님은 꽤 많이 서운하셨던 모양입니다.  

10년전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정년퇴임을 앞둔 한 여성기관장과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그 때 한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은 센치해져서 찻집에 앉아 시집이라도 한권 읽고 싶은데 그러면 노인네가 주책이라고 할까봐 그럴 수가 없어... 육십넘은 할머니라고 감성이 없는게 아닌데... 소녀시절의 감수성이 사라지는게 아니라 주변의 눈때문에..."

우리는 쉽게 할머니는, 할아버지는 혹은 아줌마, 아저씨는 어떨것이다라는 세대나 성별차이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정관념의 범위를 벗어나면 냉소를 보내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아흔의 할머니가 무슨 예쁜 지갑이 필요하냐는 말도 할수 있게 되는 거지요.

가만 생각해보면 저 또한 내재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써 낡은 지갑을 보며 새로 하나 사드릴까 하다가도 늘 괜찮다고 말씀하시는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거든요. 노인이라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했던거지요. 그래서 예쁜 지갑 하나 사드리지 않은 것을 반성했습니다.

아흔 아니라 백살의 할머니에게도 이왕이면 예쁜 지갑이 필요하다는 사실 잊지마세요~